문학 선생님이 있었다면 독후감을 제출했을 법한 책이었다.
뭔가를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퍼즐(종류불문)을 병적으로 좋아하는 내 감각세포들이 하나하나 북받쳐 일어나
감정의 종류가 복잡하고 다양하다 못해
자력으로 분화되어 각자의 카테고리를 가지며 끊임없이 뻗어나갔다.
시간이 지나자 책으로 인해 느껴진 감정이라고 하기엔
너무 이질적이고 멀리 왔다는 생각에
아주 단순하고 무식한 리뷰를 써보기로 했다.
이 책은 매우 치밀하게 계산된 게임이었다.
은희경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뜨개질'이라 할 수 있겠다.
작가의 입장에선 '전체적으로 고르게 뜨기가 가장 어려웠을 것' 이고
- '좀 빽빽해졌다 싶어 실을 느슨하게 하면 앞부분과 균형이 맞지 않았다.
다시 빽빽하게 뜨면 얼마 안가서 다시 느슨하게 떠야했다.
그런 과정을 반복하게 되면 모양은 어김없이 망가졌다.'
독자의 입장에선 집중하고 정숙해야 했다.
- '자칫 콧수를 놓치고 무늬가 틀어질 수 있기 때문에'
<수록 작품 발표 지면>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 문학동네, 2009년 여름
프랑스어 초급과정
- 세계의 문학, 2009년 여름
스페인 도둑
- 문학과 사회, 2012년 가을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
- 현대문학, 2012년 11월
독일 아이들만 아는 이야기
- 문예중앙, 2013년 봄
금성녀
- 문학동네, 2013년 가을
<'헝클어진 실 중에서 어떤 것을 서로 이을지 모르지만 처음부터 무늬는 정해놓았을 것이다.'>
작가는 첫 단편을 쓰기 시작할 무렵엔
헝클어진 실 중에 어떤 것을 이을지 정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의 단편들이 이어질 것이라는 베틀의 '무늬'는 정했음이 틀임없다.
2009년 여름부터 2013년 가을까지 발표된 시간적 길이을 고려하면
골탕을 먹일 목적이라기 보단,
'뜨개질'을 시작한 은희경 작가의 잘 짜여진 '균형'이지 싶다.
'장인의 품위와 너그러움'이 느껴지는 균형잡힌 힘조절 덕에
멋들어지는 목도리가 탄생했다.
온전한 책으로 이들을 한꺼번에 접할 수 있었던 나는
천만 다행의 운을 누린 셈이다.
빗물이 빠져나가질 않아 한참을 두리번 거리다
발아래 수채를 발견하고 뚫어주었을 때
그 개운함에 비견할 만했다.
책을 읽고 느낀 감정이나 철학, 가치 등은 배제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오롯이 독자 개개인의 몫이므로
내것과 남들의 것이 동일한지 알기 위해 이런 저런 검색을 하는 건
가위바위보를 하다 보자기를 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보자기와 비교하는 것처럼 어리석어 보였기 때문이다.
우선 은희경 작가의 불친절한 퍼즐을 바로 잡아 보겠다.
우선 금성녀 마리의 시선에서 볼 때
죽은 오빠의 딸은 완규의 엄마이고, 언니 유리의 둘째아들 처는 <안나>이다.
안나는 완규엄마의 옆집 하숙생이었다.
화장실이 급해 찾아간 옆집에서 그녀들은 잠시 마주쳤다.
루시아와 안나는 12살 성당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다.
안나와 루시아는 오래도록 만나는 친구는 되지 못했다.
신접살림을 신도시에서 차리고 만삭의 몸으로 맥주를 마신 여자는
완규의 엄마이다.
13살에 미국에 건너간 태현의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못하는 엄마'는 안나다.
완규엄마는 술과 커피와 고립에 중독된 채
신혼 때부터 집에 잘 들어오지 않은, 있으나마나한 남편에게 맞고 살았다.
안나는 이혼이 두려워 떠난 미국에서
이혼보다 더한 두려움 속에서 산다.
죽음이 스쳐간 집들을 쇼핑하는 것으로 낙을 삼는다.
완규의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연' 소영과
태현의 목도리를 떠준 이원은 앞선 여자들과 묘한 교집합이 있다.
신도시를 떠나지 않고, 늘 맥주캔의 고리를 부러트리는 소영과 완규엄마
수학여행을 빼고는 집을 벗어나 본적이 없는 이원과 완규엄마
뭔가 남들과 핀트가 맞지 않은(어떤 것에도 익숙해지는 법이 없는, 배움 장애) 이원과 안나
- 버스에서 목도리를 두고 내리는 이원과, 학창시절 버스를 잘못 타거나 정류장을 놓치는 안나는
같은 사람으로 착각될 정도다.
기억하는 일에는 소질이 없지만, 한번 각인된 기억은 없어지지 않는 소영(완의 포옹)과 안나(노상방뇨)
한 여자가
몽돌밭에 서서 조약돌을 여러 개 던졌는데,
다른 돌들과 아주 비슷하게 생겨 어디쯤에 놓였는지 확실치 않지만
그럭저럭 저쯤이겠다 가늠할 수 있는 곳을 바라보며
'그래도 돌이 떨어질 때 나는 소리는 엇비슷하구나.'
하고 있는 느낌.
책을 다 읽은 후에 느낌을 굳이 요약하자면 그랬다.
은희경 작가의 '냉소'는 익히 알려져 있다.
관계의 허망함이라기 보단,
쓸모를 매기는 자체도 실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
풍경이 있고,
그 풍경에 잠시 머무름은 생명의 주된 기능이다.
무언가를 바꾸고, 꾸미고, 쌓아올리더라도
시간이 흐르고 난 후의 다른 풍경일 뿐
생명이 이뤄낸 업적일 수 없다.
굳이 생명의 정의를 묻는다면,
흘러가는 시간을 채워주는 매질 정도가 아닐까.
고립에 중독된 것이 아니라
늙으면 알게되는 '하찮은 존재의 이유' 때문에
고립만은 피하고 싶었던 <유리>가 스스로의 죽음에 개입해 자살함으로써
더이상 '흘러가지 않음'을 택한 것도 그런 의미인듯 싶다.
이 주인공들 인생의 교차점에 보여지는 6개의 풍경은
삶의 가치를 찾는 수많은 종교인들과 철학자들의 노력에
어슴푸레 조롱을 날린 것과 다름없다.
짐승보다 더 다양하고 유용한 소통의 도구들을 가졌으나
덜 소통하고 덜 공감하는 방식으로 진화해가는 인간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의미'를 좇다
결국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저 그곳에 머물렀음 하나로 모든 가치를 축소한 채
불행하지 않을 권리를 누리는 건 어떨까.
죽음은 야속해도, 공포는 아니어야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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