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맨체스터 바이 더 씨 (Manchester by the Sea, 2016), 쓰리 빌보드 (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 2017)

Wednesdays 2018. 5. 7. 17:11

아픔을 다루는 방식이 비슷해

엔딩 후 동일한 여운이 남는 영화였다.

'밀양'처럼 민낯을 다 드러내는 영화는 요즘 트렌드가 아닌 거다.

 

사실 이런 고통을 소재로 하는 영화에 살짝 피로감은 있다.

주인공을 궁지에 몰아 살게하고, 관객은 그들이 너무도 측은해

러닝 타임 동안 덩달아 자신의 모든 감정을 다 소진해버리게 하는...

여가를 즐기러 영화관을 찾았다가 기진맥진할 정도로 혼쭐이 나버리는 거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와 <쓰리 빌보드>가 그 대표적 예다.

 

이들이 좋은 영화라고 소개되는 이유는

만들기만 하면 중타는 하는 이런 소재를 사용해서는 아니다.

 

결국

클라스의 차이는 '몰입감'이었다.

불친절하게 뿌려놓은 과거와 현재를 열심히 주워담게 한 다음

주인공들의 행동에 대한 개연성을 뒤늦게 깨닫게 하는 흐름이

관객으로 하여금 눈을 뗄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매우 세련되게 느끼게 한다는 뜻이다.

 

요즘 상받는 감독들은 대부분 관객에게 이런 수고를 끼치는 재주를 부리는 사람들이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 나오는 '리' 역을 맡은 케이시 애플렉(Casey Affleck)은 특히 더 측은했다.

살아서 감당하기엔 너무 힘든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

가슴 어딘가에 걸려서 내려가지 않는 그 겨움을 경험했을 생각을 하니

덩달아 먹먹해졌달까...

 

-아버지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미흡하지만, 아직은 그 철없음이 싫지 않고,

진득하지 못함이 그럴 법하다고 여겨지는 평범한 가정의 한 가장이

찰나의 실수로 어린 아이 둘을 불타죽게 하고,

그 부주의한 실수로 두 아이가 불타죽었다며 취조실에서 경찰에게 고백하는 장면은

솔직히 보기가 힘들었다.

연기가 훌륭해서라기 보다는

'리'가 언제 감정을 토해낼지 조마조마했기 때문이다. 

권총을 뺏어드는 장면에 이르러서야 참았던 숨이 쉬어졌다.

전도연처럼 그냥 울부짖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쓰리 빌보드>에서 '밀드레드' 역을 맡은 프란시스 맥도맨드(Frances McDormand)

측은함이 조금 덜했다.

죽은 딸이 어느 정도는 자란 청소년이기도 했고,

불친절한 그 시기의 딸처럼 엄마도 자식을 성실히 돌보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무엇보다 '리'처럼 죽음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으니 죄책감의 무게가 다를 테고,

숨만 겨우 쉬는 '리'와는 달리 밀드레드는 경찰서장에게 분노를 표출할 여력이 있었다.

자식을 죽인 것과

자식을 잃은 것의 차이랄까...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쓰리 빌보드>

 

공교롭게도 이 영화들엔 루카스 헤지스(Lucas Hedges)란 배우의 교집합이 있다.

최근 <레이디 버드>란 영화에도 나오는데

어떤 역할이 와도 양감 있게 표현하는 재주가 있다.

한편의 영화가 빠르게 재생되면

서투른 시각으로 놓쳐버리는 많은 배우들이 있는데,

이상하게 손끝에 남은 점자의 촉감처럼 기억나는 배우들이 있다.

루카스가 그런 류의 배우다.

물론 나만 이렇게 후한 점수를 주는 건 아니다.

최근 <보이 이레이즈드>에 쟁쟁한 배우들과 함께 캐스팅되었다.

주연 콘리 역이다.

<보이 이레이즈드>는 게러드 콘리의 회고록을 원작으로 하는 10대 동성애를 다룬 영화로,

목사의 아들로 가족과 친구를 잃지 않기 위해 '치료' 캠프에 합류했다가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얻게된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쓰리빌보드의 샘 록웰을 잠시 언급하자면,

 

 

 

 

 

 

 

 

 

 

샘 록웰(Sam Rockwell)

 

 

 

 

 

 

 

 

 

어디선가 많이 봤지만 어디서 봤는지 기억나지 않는 배우.

- <더 문>을 기억해내는 사람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샘이 여러 명 나오니까...

 

딸을 잃은 슬픔을 분노로 표출할 여력이 있는 밀드레드가

경찰서장과 경찰을 향해 원없이 조롱을 퍼부을 때,

그 조롱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관객도 덩달아 조롱하는)

인종차별주의자에 폭력적이고, 한끗 정도 모자란 딕슨.

 

그 전의 영화들에서 카멜레온처럼 연기하는 그를 몰랐다면

딕슨을 연기한 건지, 자신 내면속에 딕슨을 보여준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언맨2에서 저스틴 해머와 몇몇 제스춰들이 비슷하긴 했지만

그가 쓰리빌보드의 몰입감에 최고의 재료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감독의 의도는 대부분 한 줄로 요약이 가능하다.

최근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 같은 경우는

'살인, 사기, 폭력 포함 모든 죄는 갱생의 여지가 있으며 이해받을 수 있고,

보수적인 한국에서 동성애도 더이상 쉬쉬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마약은 갱생안됨. 끝.'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

밀드레드와 딕슨이 화해하고 뭔가 열린 결말로 영화를 마무리하는 것을 보며

이 감독의 의도를 한 줄로 요약할 수 있게 되었다.

'인종차별도, 무자비한 폭력도, 무분별한 공권력 사용도, 방화도 괜찮다.

하지만 강간(살인)은 안됨. 끝.'

 

샘 록웰에게 초반에 그렇게 거칠고 사나운 경찰 연기를 시켜놓고

편지 한 통과 빨대 꽂힌 오렌지 쥬스 한 잔으로 상냥함을 가지라고 하다니...

용서의 과정이 단순화 되면

영화는 담백할지 몰라도 불필요한 찌꺼기를 남긴다.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저렇게 끝나지 않으면 끝을 낼 수 없다 싶을 정도로 결말은 좋았다.

다만,

그들이 굳이 서로 상냥함을 보이지 않아도

우린 그들의 동행만으로도 '화해'를 떠올렸을 거라는 거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나는 그들이 한 찰나도 웃지 않기를 바랬다.

 

딕슨에게 고문 당한 흑인을 위해서라도

밀드레드에게 모욕당한 제임스(피터 딘클리지)를 위해서라도

 

- 강간범을 응징하러 가는 백인우월주의자는 용서받아도 된다

난장이를 모욕하고, 딸을 성실히 키우지 않고, 남은 아들마저 성실히 돌보기를 거부하고,

경찰서에 방화를 저지르더라도 피해자의 엄마라면 용서받아도 된다.

이런 인식이 관객의 머리에 남지 않기를 바래서였다.

 

하지만, 그들은 슬며시 웃었고

관객들은 감독의 의도대로 그들의 화해에 안도했다.

딕슨을 쉽게 용서했고, 밀드레드의 방화는 이해받았다.

 

 

평생 고통 속에 살아가는 '리'에게

바닷바람 한번 쐬게 해주는 정도의 여백만 허락한 것에 비하면

과한 호사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