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hers

피임의 역사 (1)

Wednesdays 2010. 11. 7. 10:23

1. 선사시대

 

 
주술과 피임

초창기 인류 역사에서 피임의 역할은 아주 미미해 보인다. 영아살해가 자손의 수를 조절하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인류 역사의 초창기 여성들은 임신을 막기 위해 주술적 방법을 신뢰했다. 당시 여성들은 기구나, 허브, 나무 뿌리, 식물의 수액 등이 임신을 막아 줄 것이라 믿었다. 심지어 현재의 동아프리카 여성들도 임신을 피하기 위해 여전히 주술사(fundi)를 찾고 있다고 한다. 주술사들은 숲으로 가서 두 종류의 나무 껍질을 하나의 끝으로 엮은 후, 이것에 계란 노른자를 문지른다. 그리고 세 가닥으로 다시 묶은 다음 주문을 외우는 방식으로 의뢰인들의 임신을 막아준다.

임신을 막기 위한 조치들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사람들이 성교와 남성의 사정 그리고 임신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이후부터이다. 초창기 방법 중의 하나로 사정전에 질에서 성기를 빼는 질외사정법 또는 성교중단법(Coitus interruptus)이 있었다. 이것은 사정 직전에 남성이 자신의 성기를 여성의 질에서 빼내는 방법이다. 남성이 사정을 참는 보류성교(Coitus reservatus)법도 사용되었다.

 

 

여성들이 사용한 방법의 하나로 12.7 cm 길이의 오크라 꼬투리를 질에 삽입하여 자궁의 입구를 막는 방법이 있었다. 이 방법은 오늘날 콘돔과 유사한 원리를 사용하고 있다. 꼬투리의 막힌 끝을 자궁경부 쪽에 놓고 꼬투리의 열린 쪽을 통해 음경이 삽입된다. 
성교 후에 자궁을 깨끗이 씻어내는 방법 또한 자주 사용되었다. 이 방법을 사용할 때 종종 레몬 주스와 같은 물질을 사용 하였는데, 이는 오늘날 살정제(spermcide)와 같은 기능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2. 이집트 중왕국
-1850
 

 

악어 똥과 향

파피루스 문서에 담겨 있는 이집트인들의 피임법은 주로 여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임신을 막기 위해 이집트 여성들은 악어 똥으로 만든 마개 같은 다양한 물질을 자궁에 삽입했다. 얼핏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 방법은 부분적으로 과학적인 근거에 기초하고 있다.

마개 등과 같은 물질은 정자의 침입을 막는 장벽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사용된 악어 똥은 오늘날 임신을 막아주는 화학물질들과 동일한 알칼리성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악어 똥은 나중에 코끼리 똥으로 대체되었는데, 이것은 코끼리 똥이 더욱 산성을 띠고 있어 살정제(spermcide)로써의 효과가 더 컸기 때문이었다.
파피루스 기록에 따르면 왁스와 숯을 사용하여 향을 피우는 피임법이 있었다. 여성들은 자궁으로 연기가 직접 들어갈 수 있도록 특별히 설계된 가마솥에 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고 한다.

 

  

 

 

3. 이집트 신왕국

-1550

정자를 죽이는 아카시아 좌약

파피루스로 된 한 이집트 문서에는, 최초로 지혈 마개 모양을 한 질 내 좌약을 만드는 비법이 담겨 있다. “여성이 2~3년 동안 임신을 하지 못하게 하려면, 대추야자와 아카시아의 열매를 갈아서 꿀로 버무린다. 그리고 그 버무린 것을 면에 묻혀서 질 내에 삽입한다.” 

이 질 내 좌약은 성교 전에 질 깊숙한 곳에 삽입된다. 이 방법은 피임을 위한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아카시아나무에서는 점액질의 수액이 스며 나오는데, 이것이 질 내에 삽입되면 젖산으로 변화하여 아주 훌륭한 살정제로 변한다. 꿀은 일시적으로 자궁경부 위쪽에 아주 얇은 막을 형성하여 정자가 통과하지 못하게 한다. 아카시아 나무에서 나온 젖산은 20세기 초부터 사용된 여성용 피임기구 페서리를 만드는 아주 중요한 재료로 사용되고 있다.

 

 

 

-1300

임신을 막아주는 허브반죽
이집트 파피루스 문서에는 허브반죽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
여성이 4일 동안 연속으로 사용하였다. 고대 이집트의 여성들은 이 반족을 자신의 질속에 삽입하기도 하였다.                                                                       

 

  

 

4. 그리스 고전시대
-460

 


히포크라테스와 피임

저명한 그리스인 의사 히포크라테스는 성교 후에 여성이 질에서 정액을 제거하는 조치를 취하라고 권했다. 그는 손을 이용한 몇 가지 동작으로 정액을 질 내에서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시대의 문서들에 따르면 손을 이용한 방법이 광범위하게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5. 고대 그리스 및 헬레니즘 시대

-384

 


아리스토텔레스와 피임

“남성만이 새로운 생명의 창조자이다. 남성의 정자는 영혼을 가진 생명체다. 여성이라는 기관은 오로지 새로운 생명의 출현을 위해 존재한다.” 철학자이자 자연과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와 같은 생각을 기반으로 하여, 남성이 생물학적으로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사고를 확립했다.
그는 임신 순간의 정자 온도에 따라 태어나는 아이의 성별이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따뜻한 정자는 남자 아이를 만들고, 차가운 정자는 여자 아이를 만든다고 한다. 성별이 정자의 온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 이론을 현대 과학 이론으로 분석해 본다고 해도 완전히 비논리적인 것은 아니다. 실제 많은 양서류 새끼들의 성별은 알을 품고 있고 있을 때 온도에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가지 피임법을 제안하고 있다. 올리브 오일과 꿀을 섞어 정자가 통과하지 못하도록 자궁경부에 바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차단피임법(barrier method)의 초기형태이다. 자궁 경부를 도구나 물질로 막아보겠다는 생각은 이미 오래된 것이다. 이 당시 많은 문명의 여성들은 레몬과 같은 산성 과일을 반으로 쪼개서 기계적으로 자궁경부에 씌우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 방법이 진화를 거듭하여 오늘날 페서리나 경부마개 등이 개발되게 된 것이다.
레몬 주스는 화학적 피임제로 아주 효과적인데 이것은 레몬의 산성이 정자에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6.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

-356

 

일부다처제가 아니라 피임으로

알렉산더 대왕 시대, 팔레스타인 지역의 기근으로 인해 사람들은 충분한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많은 자식을 생산해내는 일부다처제가 금지 되었고, 피임법의 사용도 자연스럽게 허용되었다. 출산이 허락된 자녀의 수도 두 명으로 제한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에도 피임법은 존재하였다. 당시의 문서에 따르면 고무와 소량의 명반 그리고 은화 하나 무게만큼의 사프란을 섞어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무, 명반, 사프란의 세 가지 요소들을 잔에 섞어 마셨으며, 그 결과 피임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이 방법은 주로 사프란의 효과에 의한 것이었다.

  

 

  
7. 로마제국

50

부적과 미신의 힘

1세기경 그리스인 의사 페다니우스 디오스코리데스가 설립한 이론은 미신에 크게 영향 받은 것이었다. 그는 임신을 피하고자 하는 여성은 자신의 생리 때 피를 바르고, 아스파라거스로 만든 부적을 지니고 다녀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사람들은 버드나무가 피임과 관련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디오스코리테스는 피임의 한 방법으로 버드나무 잎 가루를 처방했던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다양한 형태로 버드나무 잎과 껍질이 이미 사용된 기록이 있었다. 살리신(salycin)이 19세기 버드나무 껍질에서 추출될 때까지, 버드나무 잎과 껍질은 해열제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살리신으로 만든 살리신산은 류머티즘, 통증, 고열 등의 치료제 생산하는 데 있어 필수 물질이 되고 있다.
로마 학자 대(大) 플리니우스는 임신을 막기 위해 특별한 부적을 가지고 다닐 것을 권했다. 그 부적은 장님거미에 기생하는 두 마리의 기생충을 떼어 내어 사슴가죽에 싸고, 이것을 동틀 무렵에 여성의 목에 거는 것이었다.

 

 
100

부인과 의학의 탄생

기원후 2세기 소라노스(Soranos of Ephesus)라는 위대한 부인학 의사가 있었다. 그는 로마에서 의술을 펼쳤으며, 부인과 의술의 창시자였다. 그는 30~40가지의 물질들을 피임도구로 사용하였다.

그는 낙태는 오직 임산부의 건강이 위태롭게 되었을 경우에만 행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예방적 방법'이라 불리는 피임을 하라고 권했다.

또한 생리 전후에 성관계를 금할 것을 처음으로 주장한 것도 소라노스였다. 오늘날 생각으로는 그의 권고가 특별한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이것은 임신과 여성의 배란주기 사이의 관계를 그가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8. 초기 비잔틴 제국

350

미신과의 전쟁
그리스인 의사 오리바시오스(Oribasios)가 쓴 짧은 글 속에서 피임에 관한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버드나무 잎, 양치류 뿌리, 양배추 꽃 등으로 만든 차를 마시거나, 넓은묏황기로 만든 연고를 남성의 성기에 바르거나, 양배추꽃이나 왕관나비나물씨로 만든 페서리를 사용하여 피임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피임을 위해 주스 등을 사용하는 것을 비난했으며, 그 당시 만연했던 미신적 피임 방법들을 퇴치하는 데도 헌신했다.

  

 

500
오르가슴과 임신


아티오스(Aetios of Amida)는 당시 의료계의 권위자였으며, 그의 업적은 향후 몇 세기 동안 매우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다. 그는 여성이 성교를 하는 동안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한다면 임신을 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억지로 성교를 강요당한 여성은 임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임신을 막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부적을 지니라고 권고했다. 그리고 최초로 식초와 소금물에 남성의 성기를 씻을 것도 제안했다.

 

 

 

 
9. 중 세
1000

 
중세의 피임

 

중세에 가장 힘있는 집단은 교회였다. 교회는 남성중심 사회를 지지했다. 예를 들어 젊은 남성은 12~15세의 어린 나이부터 성인으로 취급되어 성인이 누리는 법적 권리, 무기소지권 및 결혼 등을 할 수 있었다.
여성의 주 임무는 자손을 낳는 것 특히 아들은 낳는 것이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이혼의 가장 중요한 사유가 되었다.
중세 시대 가장 잘 알려진 피임 방법은 석류씨 피임법이었다. 석류씨에는 여성의 몸 속에서 생성되는 성호르몬과 유사한 식물성 에스트로겐이 고밀도로 포함되어 있다. 이 호르몬은 몸 속에서 화학적 구성물을 만들어내고 생물학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정상적으로 에스트로겐을 만들어내는 여성이 석류씨를 장기간 복용한다면 난자 성숙을 방해 받게 된다. 그러나 에스트로겐을 잘 만들어 내지 못한 여성이 석류씨를 복용한다면 배란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중세 말기


색슨족 스타일의 성교

보다 진화된 피임법이 14세기의 기록에 남아있다. 색슨족이 이 방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색슨족 스타일이라고도 하는 데, 역행성사정(retrograde ejaculation)이라고 알려진 방법이 그것이다. 이것은 사정 직전에 여성이 남성 성기의 아래 부분을 꽉 쥐어 정자가 나오지 못하게 막는 방법이다. 이렇게 되면 정자는 방광 쪽으로 되돌아 가게 되는데, 역행성사정이라는 이름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역행된   정자는 나중에 소변으로 나오게 된다.                      
이 방법은 오늘날까지도 널리 쓰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 이전에 사용된 성교중단법(Coitus interruptus) 만큼이나 위험하다. 요도에 남아있던 미량의 정액이 의도치 않게 세어 나와 임신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10. 르네상스 시대

1402

정조대

1402년 공학자 K. 키이저 (Konrad Kyeser von Eichstadt)는 정조대 사용에 대한 최초의 글을 남겼다. 정조대는 여성이 성교를 하지 못하도록 만든 것으로써 꽉 죄는 금속 허리 벨트와 벨트에 붙여있는 다리 사이에 들어가는 금속밴드로 구성되어 있다.
정조대는 십자군 전설과 연관이 있지만, 중세에 사용되었다는 구체적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키이저는 정조대가 프로랭스 지역에서 사용되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정조대가 이탈리아 도시들에서 발명되었다는 근거도 남아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정조대는 르네상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간주된다. 쿠므즈(koomuz)라고 불리는 초기 형태의 정조대는 성서 시대에 여성들에게 사용되었다고 보고되고 있다.

 

 

     

 

1539

히에로니무스의 허브에 관한 책

1539년 의사, 신학자, 식물학자였던 히에로니무스(Hieronymus)는 그의 허브에 관한 책에서 피임과 낙태의 효과가 있는 다양한 허브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칼라로 된 많은 그림과 과학적 방법 때문에 이 책은 당대에 가장 인기 있는 책이었다. 이 책 속에서 히에로니무스는 낙태에 사용되는 구족도리풀(Asarum europeaum)의 사용법을 설명하고 있다. 여성들이 이것을 싫어할 때에는 개양귀비와 아룸 등을 사용할 것을 권하였다. 태생초는 힘을 쓸 때나 생리통에 효과가 있을 수 있다고 한다. 기사의 박차라고 불리는 콜솔리다 레갈리스(Consolida regalis)는 임신을 막아주고, 백수련의 뿌리는 성욕을 감퇴시켜 금욕하게 만든다고 한다. 
이 책에는 노간주 오일도 언급되어 있다. 이 오일은 생리가 안될 때 생리가 되도록 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여성의 인체와 자궁 속 난자의 성숙과정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월경의 실패를 임신의 시작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단순한 출혈의 정지 정도로만 여겼다. 생리가 되도록 하는 노간주 오일을 사용함으로써 태아의 낙태가 이뤄졌다.

 

      

 

1564

린넨으로 만든 콘돔사용

16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의사이자 해부학자였던 G. 팔로피아(Gabriele Fallopia)는 린넨으로 만든 남성용 콘돔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남겼다. 이것은 당시 크게 만연하던 매독과 같은 성병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남성이 성행위를 하고자 할 때는 언제나 먼저 자신의 성기를 옷으로 닦아내야만 한다. 그리고 귀두와 음경의 표피를 덮을 수 있는 크기의 린넨 천을 끼운다. 그리고 가능할 겨우, 이 천으로 만든 콘돔을 타액으로 적신다.”
이 린넨 콘돔을 사용하기 전에 수은이나 석탄재가 녹아 있는 미네랄 소금물에 담가 두는 것도 권장되었다. 이런 방법들은 오늘날 전염성 질병들을 막든 데 실질적 효과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다. 하지만 이 콘돔을 사용하게 되면 전염을 일으킬 것이라 생각되는 점액막이 손상될 수 있었을 것이라 판단된다. 
팔로피아는 자신의 이름을 딴 팔로피아 튜브를 발견하기도 했다.

 

  

 

 

11. 바로크 시대
1677

 
현미경으로 정자 발견


독학으로 박물학을 연구한 네덜란드의 A. 레이벤후크(Antoni van Leeuwenhoek)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현미경의 발명가로 불린다. 1670년경 그는 현미경으로 단세포 조직들과 박테리아를 최초로 발견했다. 그리고 1677년 레이벤후크는 최초로 정액 속에 있는 정자를 관찰했다. 이것은 인간의 생식을 이해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발전이었다. 이 당시까지 정액과 임신에 관한 이론들은 여전히 불명확한 것이었다. 정액과 임신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난자 세포가 아직 발견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여성들은 여전히 일종의 인큐베이터 구실을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남성만이 새 생명을 만들어 내는 데 기여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레이벤후크는 현미경을 가지고 연구를 계속하여 1682년 최초로 적혈구 및 신경 섬유의 단면 등을 발견하였다.

 

 

  
12. 로코코 시대
1700

 
카사노바와 콘돔

콘돔은 오늘날 남성들이 사용하는 몇 안 되는 피임법 중의 하나다. 최초의 콘돔은 아마로 짠 섬유인 린넨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임신을 막는 효과가 그리 크지 않았다.
18세기가 들어서야 송아지, 양, 염소와 같은 동물 내장으로 만든 성능 좋은 콘돔이 처음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카사노바는 18세기 '영국식 오버코트(English Overcoat)'라고 불리는 콘돔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치명적인 매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콘돔은 보통 라텍스를 사용하여 만든다. 하지만 이 천연 소재가 알레르기 반응을 유발하기 때문에, 폴리우레탄으로 만든 콘돔이 최근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 보다 안전한 호르몬 피임법 등이 존재하긴 하지만 콘돔은 여전히 성행위를 통해 전염되는 질병을 막는 가장 중요한 도구로 인식되고 있다.

 

 

 

  

 

13. 낭만주의 시대

1848

수탉을 이용한 초창기 호르몬 실험

호르몬의 존재가 최초로 밝혀진 것은 1848년의 동물 실험을 통해서였다.
독일인 생리학자 A. 버트홀드(Arnold Adolph Berdhold)는 수탉을 거세하면 거세된 수탉은 더 이상 울지 않으며, 수탉의 볏도 줄어들고 색깔도 바래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그 거세한 고환을 새에 이식하면 수탉의 경우와 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이런 발견에 기초하여, 버트홀드는 고환에서 어떤 물질을 분비하며 이 분비된 물질이 체내의 혈류를 타고 흐른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분비된 물질이 바로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이라는 남성 호르몬이라는 사실은 1930년대가 되어서야 명확하게 밝혀졌다. 이 연구 덕택에 오늘날 버트홀드는 호르몬을 연구하는 내분비학(endocrinology)의 아버지로 추앙 받고 있다.

 

 

     

1850
고무로 만든 콘돔 발명

1843년 미국인 화학자 찰스 굿이어(Charles Goodyear)는 혁명적인 공법을 발명해냈다. 고무에서 유황을 제거하여 경화시키는 방법인데, 이 경화된 고무에 열을 가해 고무의 내구성을 높였다. 이 공법을 통해 생산된 고무는 방수는 물론 비바람에도 끄떡없으며, 잘 찢어지지도 않았다.
이는 고무의 경화 공법을 통해서 얇으면서도 질진 값싼 라텍스 콘돔이 대량생산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임신 예방을 위한 목적도 있긴 했지만 라텍스 콘돔은 주로 임질, 매독과 같은 성병을 막기 위해 사용되었다.

1850년 당시 법률은 피임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콘돔업체들은 꽤 오랫동안 자신들의 콘돔 상품에 “약국판매용 / 간염성 질환 예방용” 과 같은 문구를 써 붙여야만 했다. 의료 목적으로 종종 사용이 허락되긴 했지만 20세기 중반까지 많은 지역에서 콘돔 판매는 승인되지 않았었다.

 

 

  

  

14. 산업화 시대
1851

 

쉐링의 녹색약국

약학자인 쉐링(Ernst Schering)이 1851년 설립한   녹색제약(Green Pharmacy)이 오늘날 다국적 제약회사인 쉐링사의 시작이었다.

쉐링사는 연구 중심의 의약 기업으로 호르몬 피임, 여성의 생리불순 및 남성의 테스토스테론 결핍 등의 치료제 개발 분야의 선두기업이다.

창립 직후부터 쉐링의 녹색제약은 약품 품질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 안에 전국에 수많은 지점들을 확보함으로써 쉐링은 약품 이외에도 향수, 섬유, 가죽, 비누, 불꽃놀이 기구 등과 같은 화학제품에도 손을 댈 수 있었다.
1855년 실험실 생산 제품이 늘어나자 공장이 설립되었고, 이 공장이 1871년 공공유한회사 (Chemische Fabrik auf Actien)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이 회사가 쉐링사로 바뀌게 된 것이다.

 

 

 

 

 

 

 

 

 

 

 

 

 

 

 

 

 

 

 

* 이 자료는 Bayer Schering Pharma 에서 제공한 자료에 의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