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The Past, 2013)

Wednesdays 2018. 5. 22. 23:58

 

아쉬가르 파라디(Asghar Farhadi)는 이란 감독으로

처음으로 타국 프랑스에서 영화를 찍었다고 한다.

어느 나라에서 찍으나 상관없는 스토리였지만, 

로 정한 건 감독의 대단한 역량인 듯 싶다. 

삶을 현미경처럼 들여다 봤을 때 몰려오는 피로와

프랑스가 가진 세련미의 대조가

도리어 비참함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씩 실체가 드러날 때마다

뇌주름 사이사이에 불순물이 끼는 것을 불어가 중화시켜주는 효과가 있었다.

언어에 편견이 있는 건 아니지만,

여주인공 베레니스 베조(Berenice Bejo)의 실감나는 연기가

영어였거나, 독일어 혹은 중국어였다면

그녀를 비난하는 입장에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한국에서 자란 나는

요즘 시대의 자유분방함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사람들은 나의 이런 고지식함을 따분해하겠지만

아직은 그릇된 부모를 보며 눈살이 찌푸려지고,

그들의 변명에서 궁색함이 보인다.

 

매트릭스의 끔찍한 인큐베이터가 우리의 현실이 아니라면

언젠가 인간의 '관계'가 모조리 축소되고 생략되어 버린다고 해도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마지막까지 존속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이런 기본적인 관계마저 힘에 겨운 이유는

어머니라는 사람의 성별과 권리, 또는 사회가 부여하는 의무가 충돌하면서

자신의 삶의 일부분을 자식들을 위한 삶으로 희생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납득되지 않기 때문이다.

책임은 강요할 수 있을지언정 희생은 강요할 수 없다.

(물론 영화에 나오는 누구도 무언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다.)

 

기본적인 책임도 겨우겨우 짊어지고 사는 사미르와 마리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혈연'관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지하에 버려진 짐들처럼 두 딸을 버려놓고 떠난 아마드가

자신의 편의에 의해 언제든 생략될 수 있는 관계에

두 딸을 두었다는 게 화가 날 뿐이다.

 

덜마른 페인트가 아마드의 어깨에 묻었다.

'관계'는 잠시만 머물러도 그렇게 쉽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경고라도 하듯이...

 

하지만

아마드는

어마어마한 모순과 해결해야 할 문제들 사이에서

딱 한가지의 퍼즐만 맞춰놓고 떠난다.

 

예상했다시피 이 영화는 Chaos 그 자체다.

이혼을 하러 온 전남편의 호텔을 예약하지 않은 마리와

이혼을 하러 온 주제에 자신의 호텔조차 스스로 예약하지 못하는 아마드.

전남편과 감정의 찌꺼기가 남은 채로 일상의 외로움이 싫어 유부남과 바람 피는 마리와

자살시도로 식물인간이 된 아내에게 죄책감과 미련이 남았음에도

마리의 전남편 아마드를 시기질투하는 사미르.

또한,

서로 손을 맞잡는 것조차 내키지 않으면서

덜컥 결혼부터 하겠다는 그들의 억지.

결혼 전 임신부터 해버리는 무모함.

얌전하지 않은 마리의 두 딸과 사미르의 어린 아들,

특히 딸 루시의 이해되지 않는 반항.

 

 

아마드가 '장군'이라며 놓은 한개의 퍼즐은

아마드가 그들의 삶에서 최종적으로 커트 당할 수 있는 신의 한 수였다.

루시의 오해를 해결하며

그들을 임시로나마 봉합 해놓았기 때문이다.

 

 

 

<위플래쉬>라는 영화를 본 후 한 트럼펫 연주자가 '호러영화'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스승이 재즈 밴드에 있는 제자들에게 '범죄'에 가까울 정도로 다그치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허용이 되는 '장르'가 재즈라고 했다.

 

황덕호(재즈칼럼니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왜 재즈를 연주하는 것일까?

오로지 재즈만이 그들의 미적 양심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어떻게 하다가 악기를 잡은 이상

그들은 재즈라는 음악의 어느 수준에 반드시 도달하고 싶은 것이다.

일반적인 팝음악에서는 사용하지도 않는 기이한 코드 진행과

복잡한 리듬을 손에 완전히 익혀서 그것을 즉흥 연주로,

자신만의 스타일로 완벽하게 소화해내고 싶은,

무모하고 철없는 목표를 삶의 이유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재즈 음악인들이다.

 

 

결국 삶을 들여다보면 어디나 공포의 소지가 있다.

화려한 연주자의 삶도 근접지에서 보면 녹록하지 않을 것이다.

세탁소의 불법체류자 나이마의 인생도 만만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식물인간이 된 사미르의 아내가 손을 꽉 쥐는 듯한 장면은

다음 장면으로 대신하겠다.

 

그래서?

어쩌자고?

 

 

인간에게서 발정기를 없앤 진화의 최종 목적은

결국 인간의 DNA의 멸종인 듯하다.

 

어떻게 어떻게 살아지는 삶을 투영하고자 하는 사실적 접근

뭐 이런 건 중요하지 않다.

 

사미르의 아들에 진 미간의 깊이만큼

'관계'를 선사한 부모에 대한 실망이 깊다는 게 중요하다.

그들은 그들의 부모와 똑같이 살거나,

종족보존을 위한 생식을 포기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해답이 없는 게 인생이라지만

해답 없이 나열하는 영화도 대세라지만,

(넋놓고 영화에 들어갔다왔음을 부인하진 않겠다.

혼란을 겪는 그들 하나하나가 되어 2시간을 살았다.)

 

사미르와 맞잡은 아내의 손이 엔딩이었어야 하다니...

'절대 니 삶에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여자의 복수를 상징하는 것인가?

 

푸아드 앞에서 약을 먹고 자살 시도한 엄마 같지도 않은 엄마는

죽지도 않는 시체처럼 누워서

푸아드에게

밥이라도 챙겨주는 새엄마와

그나마 놀아주는 이복 누나들과

곧 태어날 동생을 뺏었다.

 

 

기본도 하지 않은 엄마는

기본만 하는 엄마의 자리도 허락치 않은 것이다.